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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평신도를 위한 침묵피정 후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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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5-09 12:12 조회2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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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정 후기

이승훈 프란치스꼬

 

차를 운전해서 여주로 가는 길이 마음이 다급하다.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저녁 늦게야 피정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서두르다 엄청 헤맸다. 고속도로 출구를 지나쳐서 되돌아오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예정보다 삼십분도 더 늦게 도착했다. 이런저런 자책이 든다. 그런데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환한 미소로 잠긴 문을 열고 반갑게 맞아주시는 수녀님. 따뜻한 환대가 서두르느라 졸인 마음을 포근하게 어루만져준다. 주님의 품 안에 들어왔음이 느껴진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엔 마음의 여유가 없는 각박한 생활에 젖어있어서 그런 너그러운 포용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서둘러 짐 풀고 길잡이와의 면담. 피정에서 무엇을 원하느냐기에 그분을 찾고 싶다고 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너무도 분명하게 느껴지고 불기둥처럼 나를 인도하시던 그분.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눈 떴을 때 문득 들었던 의문. 왜 요즈음은 그분이 전혀 안 느껴지지?

 

아주 혼란스러웠다. 그때 그분께서 나의 일을 엄청 도와주셨는데, 지금은 어떻게 된 거지? 몇 달 전에 착각했던 건가? 지금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는데, 왜 그때 그 잘못을 깨닫게 해주지 않으셨지? 아니면 지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잘못된 건가? 이런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에 대해 이 피정을 통해 답을 찾으면 좋겠다고 했다.

 

성서 묵상. 마음이 잘 모아지지 않는다. 몸이 너무 피곤한데다, 피정 시작한 지 불과 한 시간 남짓밖에 안 되었으니 뭐가 될 리가 만무하다. 지금 안 되는 건 그렇다 치고, 내일을 위해서 오늘 조금 더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조금 더 하고 침대에 누웠다.

 

방이 남향이라서 좋았다. 아주 오래 전에 여기서 피정했을 때. 잠자려고 불 끄고 누웠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달이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는 달은 보이지 않았지만 예전에 달을 보았던 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새벽 미사에 이어 산책. 신선한 공기가 좋다. 수녀원 밖 시골길. 예전에 걸었던 길. 걸어서 좋았던 길, 그 길을 다시 걷는다. 작은 시냇물. 그 시냇물을 건널 수 있게 해주는 징검다리. 문득 깨달음. 세상은 다리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징검다리로 이루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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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묵상 중 새롭게 깨달은 것. 나는 그동안 구약보다는 신약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었다. 구약은 구닥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있었던 구닥다리라고. 참 빛이 오기 전에 있었던 낡은 빛이라고.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다. 예수님이 오셔서 새 빛을 비추어 주신 것은 맞지만, 그 빛은 과거의 약속을 폐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약속이 무엇이었는지 밝게 보여주시려 하심이라는 것을.

 

나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사랑을 동사가 아니라 명사형으로만 이해했다. 그래서 사랑이신 것은 맞는데, 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음을 알았다. 하느님은 꼼짝하지 않는 분이 아니시다. 사랑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드라마틱하게, 역동적으로 사랑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지 않은가. 이제 구약을 열심히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느님에 대해서는 구약에 더 잘 나와 있으니까.

 

다음 묵상. 좀처럼 묵상이 깊어지지 않는다. 잠시 쉬었다가. 성당으로 옮겨 다시 묵상, 갑자기 그분이 나에게 서운했던 것을 마구 쏟아내신다. 할 말이 없었다. 다 맞는 말이니까. 무릎 꿇고 용서를 청한다. 큰 위로를 받았다. 그분도 속이 좀 후련해지셨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동안 서운했던 것들을 속 시원히 말 하셨으니까.

 

23일간의 짧은 피정이었지만, 참 많은 것을 깨달았고 많은 것을 얻었다. 피정 시작하면서 얻고 싶었던 답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과 화해까지 했으니 말이다.

 

문득 주일미사 후에 피정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기간이 지났지만 가능한지 문의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피정 접수된 후 밀린 일들이 너무 많아서 살짝 후회도 하고 심지어는 취소할까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일에 치여서 생활의 여유를 잃었을 때, 그때가 피정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생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삶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경우에는 열심히 갈수록 더 나빠진다. 다시 되돌아와야 되기 때문이다. 방향을 바로 잡고 가야 우리의 노력이 모아져서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피정을 통해 그분과의 관계를 바로잡고 잃었던 방향감각을 되찾고 나니, 산적한 일들을 체계적으로 선별할 수 있게 되고 여유를 갖게 되었다. 하느님 나라를 먼저 찾으라는 말의 의미에 이런 것도 포함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제 언제부턴가 잃어버렸던 습관인 하루 일과를 아침 성서읽기로 시작하는 것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예전과는 조금 다르게 하고 있다. 예전에는 주로 신약을 한 장 씩 읽었는데, 이제는 구약과 신약을 각각 한 장씩 읽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을 더 잘 알게 되는 방법이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랑과 이끄심에 깊이 감사드린다. 

 

​*** 2018년 4월20~22일 여주 스승예수 피정의 집에서 진행된 ​[평신도를 위한 침묵피정]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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