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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안에 터 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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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11-14 11:46 조회1,2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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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안에 터 잡기 : 원리와 기초

 

William A. Barry, SJ

 

 

우리는 하느님께,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맥킨지(J.S. Mackenzie)가 말한 하느님의 기쁨에 어떻게 끌리게 되는 것일까? 나는 이 장에서 성찰과 기도를 위한 길잡이를 짚어 줄 것이고, 이를 통해 우리가 스스로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교리문답에는 이런 질문이 있다. “왜 하느님은 우리를 만드셨나?”우리는 그 답을 외우고 있다. “그분을 알고, 사랑하고, 그분께 봉사하고 천국에서 영원히 그분과 함께 행복하게 살도록 만드셨다.”성 이냐시오도 「영성수련」 앞부분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하면서, ‘원리와 기초’라고 이름을 붙였다.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하고, 공경하며, 그분께 봉사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다.”(영성수련 23장) 이 말을 좀 더 현대적인 언어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 주님이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찬양하고, 공경하고, 사랑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틀림없이 다다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이것이 사람들 삶의 원래 목적이다.”이 말은 신학적으로는 완벽할지 몰라도 너무 딱딱하게 서술되어 있어 사람들의 삶 안에 뿌리내려 하느님과 계속 발전하는 관계를 만들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추상적인 것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지는 않는다. 이 글귀들이 삶에 뿌리내리고 관계 안에 뿌리내리려면 체험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체험은 보편적인 것, 즉 살아있는 모든 사람이 이러 저러한 형태로 공통으로 체험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 글귀가 사실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봉사하는 쪽으로 자신을 이끌어가는 체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체험이 무엇일까?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자신의 저서 『제 마음 당신 안에 머물게 하소서(Let this Mind in You)』에서, 세바스찬 무어 (Sebastian Moore)는 우리는 모두 “뭔지 모르는”것을 갈망한 체험, 굉장한 행복으로 충만했던 체험들을 갖고 있으리라고 말한다. 그는 이 체험들은 우리가 당신의 현존으로 향하고, 계속해서 당신의 현존 안에 머무르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창조 열망이 우리를 건드리는 것이라고 믿는다. “바로 이런 체험을 통해 하느님을 정의내리는 것, - 아니 하느님께로 방향을 정하게 되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런 체험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내적으로 갈망하게 만드는데, 바로 이런 것이 근본적으로는 종교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는 루이스(C. S. Lewis)가 쓴 자서전 『예기치 않는 기쁨(Surprised by Joy)』을 언급한다. 이 책에서 루이스는 자신의 체험을 이렇게 나누었다.

 

   어느 여름 날 잎이 무성한 까치밥나무 덤불 앞에 서 있었는데, 오래 전 내 동생이 유아원에 장난감 정원을 들고 가던 옛 집에서의 아침 기억이 갑작스레 내 안에 떠올랐다. 그때 떠오른 기억은 마치 몇 년 전이 아니라 몇 세기 전의 기억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사로잡은 그 감각을 제대로 표현할 만큼 강렬한 언어를 찾기란 쉽지 않다. 밀턴이 말한 에덴의 “엄청난 축복”이 아마 이와 비슷한 것이지 않았을까 한다. 물론 그것은 열망의 감각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향한 열망? 분명 이끼로 가득 찬 비스킷 깡통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나 자신의 과거를 열망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들어가지만) 내가 무엇을 갈망하는지 알기도 전에 그 열망 자체와 그 모든 찰나의 광경은 사라졌고, 세상은 다시 평범한 것이 되었다. 막 사라진 갈망을 찾으려는 마음만이 잔상으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어찌 보면, 내게 일어났던 다른 모든 일들은 상대적으로 하찮게 느껴졌다.

 

버나드 베렌슨 (Bernard Berenson)은 ‘완벽한 조화의 짧은 찰나’동안 자신을 완전히 잊었던 경험들을 언급한다. 

 

  유년기에 밖에서 즐겁게 놀고 있을 때 갑자기 어떤 희열이 나를 사로잡았다.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분명 일곱 살이 되기 전이었다. 초여름의 어느 아침이었다. 은빛 아지랑이가 참피나무 위로 피어오르며 흔들거렸고 대기는 그 향내로 가득 차 있었다. 기온은 부드럽게 안아주는 것 같이 포근했다. 내 기억에 어느 그루터기 위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그것’(Itness) 안에 깊게 빠져드는 것이 느껴졌다. - 굳이 떠올리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그 때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나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Itness)과 나는 하나였기 때문이다.

 

바이어드 (Byrd) 제독은 1934년 『남극해』라는 책에서 다음의 체험을 나눈다.

 

  오늘 오후 4시 평상시처럼 서리 속을 걸었다. 나는 그 침묵에 귀를 기울이며 잠시 멈춰 섰다.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고, 밤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깊은 평화가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자연의 작용과 우주의 힘들, 조화로움과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조화, 그것이 필요하다.......’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는 데에는 그 짧은 구절을 되뇌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 순간 나는 인간과 우주가 하나임을 아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믿는 것은 이러한 하나됨의 느낌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라고 보기에는 그 구절이 너무도 정돈되어있고, 너무도 조화로우며, 너무나도 완벽하기에....... 이 온 세상과 그 세상의 일부인 인간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 존재하는 목적이 분명히 있다. 이것은 이성을 뛰어넘는 감정이고, 절망하는 인간의 마음에 다가가, 이 절망에 근거가 없음을 알게 하는 마음이다. 

 

이런 체험이 오직 똑똑하고 중요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나는 앤 타일러(Anne Tyler)의 『향수를 일으키는 식당에서의 저녁 (Dinner at the Homesick Restaurant)』이라는 소설 속 장면을 언급하려고 한다. 펄 툴 (Pearl Tull)은 죽어가고 있는 눈 먼 나이든 여인이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홀로 세 아이들을 키웠다. 그녀는 아들 중 에즈라(Ezra)와 살고 있었고 그는 날마다 어머니가 어린 시절에 쓴 일기의 일부를 어머니에게 읽어 주었다. 대부분의 일기는 정말 평범한 일들이었고, 펄은 곧 다음 편을 읽도록 했다. 그러다 그녀가 죽기 직전의 장면이 나온다. 에즈라는 몇몇 일기를 훑어 내려가다가 읽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그는 엄마에게 읽어드렸다. “집 뒤에 있는 잡초덤불로 갔다. 마구간 옆 흙 위에 꿇어앉았다. 앞치마는 엉망이 되고, 등 뒤로는 땀이 흘러내렸는데, 소매로 얼굴을 훔치며 모종삽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 정말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해.”

  그녀의 엄마는 의자를 흔들흔들 하다가 가만히 멈춰 섰다. “옆집 소녀가 치는 피아노 음들이 창문을 통해 흘러나왔다.”그는 계속 읽었다. “양털 파리 한 마리가 풀밭 위로 윙윙거리며 날아다녔고 나는 정말 아름다운 초록빛 작은 행성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나는 다른 어떤 것이 일어나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 순간만이 전부였다. 그것은 온전히 내게 속해 있었다.”

  그것이 그 일기의 끝이었다. 그는 조용히 있었다. “고맙구나, 에즈라.”그의 엄마가 말했다.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구나.”

 

분명 펄은 그녀가 죽기 전에 그 근원적인 체험을 다시 기억하기를  원했다. 

 

아마도 워즈워드 역시 “무엇인지 모르는”것에 대해 갈망하는 체험을 다음의 시에서 표현한 것 같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

    나 어렸을 때도 그랬고

    어른이 된 지금에도 그렇고

    늙어서도 그러기를 바라노니

    그렇지 않다면 죽음이나 다름없으리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내 생애의 하루하루가 

    경건한 마음으로 이어지기를......

 

이 체험들은 하느님 체험으로, 신학적으로 해석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베렌슨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펄 툴은 하느님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믿는 이들은 이런 체험이 바로 하느님의 창조하시는 손길을 체험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체험의 영향을 알려면 우리는 먼저 이런 체험들을 성찰해야 한다.

  우선 우리는 이 체험들이 갈망을 얘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체험은 신비한 것들, 모든 것들, “뭔지 모르는 것”과 일치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C.S.루이스는 좀 더 명확히 이 점을 밝혔지만 누구나 위에 언급한 여러 체험들에서 각기 갈망의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각자의 체험에서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아주 열망해야 하고, 이 열망은 이러저러한 사물이나 건강 또는 행복 같은 것이 아니라 관계와 일치를 갈망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 체험이 깊은 행복의 느낌을 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체험 안에서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즉 자신의 가치나 선함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해서 괜찮다고 여기는 것 같고, 세상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좋게 받아들인다. 무어는 이런 체험이 하느님의 현존에 다가가려는 열망의 체험이라고 이해했는데, 그것은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갈망할 만하다.

 

  하지만 이 체험의 더 중요한 측면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좀 더 성찰해보아야 한다. 이 체험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즉 과거에 일어났던 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창조나 세상의 창조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우리는 많은 경우 오래 전에 일어났던 것으로만 생각한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수억 년 전에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다는 말을 할 때에도 우리는 임신되던 당시나 태어날 당시를 떠올린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체험은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체험이다. 이런 체험을 떠올리는 순간에 이 기억은 또 다시 새로운 체험이 된다. 루이스나 베렌슨, 바이어드나 펄 툴은 자신들의 삶에서 있었던 체험들을 설명했다. 이 체험들이 하느님의 창조하시는 손길을 느낀 체험들이라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하느님의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지 과거 어느 한 시점에 일어났던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체험들을 할 때 우리는 현재 움직이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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